볼만한 글들


2012.04.19 02:24:07
802
9 / 0

며칠 전 이른 새벽에 주말 알바를 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일요일 아침이라 출근하는 사람도 등교하는 아이들도 없는

한가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아파트 단지를 가로지르며 목련이 만개한 나무를 지나고 있는데

행색이 유난히 초라한 예순은 되어 보이는 할아버지 한분이

팔을 허우적대며 참새들을 쫓으며 혼자서 무슨 말인가를 내뱉고 있었다.

머리가 아픈 분 같기도 하고,

아니 밤새 술을 마셔서 술 주정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나는 얼굴을 찌푸렸다.

이 고즈넉한 아침을 깨뜨리는 불청객 같이 여겨져서 괜히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었나보다.

그리고 또각또각, 굽소리를 내며 할아버지의 바로 옆을 지나는 순간,

흐린 발음의 혼잣말을 들었다.

"어디 갔다 온거냐..녀석들...허허 요 나쁜 것들~

어디 가지 말어야~ 꽃물고 봄 물고 얼른 오지 이제 왔냐~

더 크게 울어~ 짹짹짹~~허허허....허허...반갑다 반가워~

봄이야~ 이제 봄이다~~내가 기다렸어 봄을....허허....

아주 좋아~기분이 좋아야~~ 허허...나쁜 녀석들....

밤은 추운데 어디서 잤니.. 허허.."

어쩌면 알콜중독자일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지능이 떨어지는 장애인인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날 해꼬지 할 수도 있는 나쁜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할아버지의 갈라지고 부르튼 그 입술에서는

싯구절 같은 말들이 노래처럼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순간, 왜 그렇게 눈물이 났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를 오해한 내가 부끄러워서?

할아버지에게 미안해서?

할아버지의 말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모르겠다.

그런데, 그냥 나도 모르게 갑자기 서러워졌다.

그 휴일 아침이 내게 너무 벅차고

너무 외롭고 너무 고단했는데

할아버지의 술주정같은, 그렇지만 시 한구절보다 더 아름답던 그 읊조림이

나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

얘야.

아이야.

힘이 드니?

많이 지쳤니?

그래도 이것보렴.

이렇게 봄이 왔단다.

꽃도 새도 노래하잖니.

너도 어서 노래를 해보렴.

고단한 짐일랑 오늘은 벗고

봄바람 타고 어디라도 날아오르렴.

얘야.

아이야.

아직 춥니?

여태 외롭니?

그래도 이것보렴.

이렇게 봄이 왔단다.

꽃도 새도 노래하잖니.

너도 이젠 노래를 해보렴.

꽃도 새도 노래하잖니.

너도 이제 노래를 해보렴.

--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꽃도 새도 노래를 한다.

나도 어줍잖은 엄살은 그만 떨고

예전처럼 꽃같이 새같이 노래하고 싶다.

한번도 외롭지 않았던 것처럼

한번도 서럽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의 아주 조금 고단한 일상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햇볕 아래로 걸어가

봄의 혜택을 고스란히 다 받아내고 싶다.

이제는 두 눈 부릅 뜨고

봄을 보아야지.

지금이 내 인생의 봄은 아니어도

마치 봄인 것 마냥 봄을 걸어가야지.

그래도 되지요?

2012.04.19 02:31:14
1. -_-
글이 한편의 시네요;
2012.04.19 04:18:04
2.
무우나악 ㅜㅜ
2012.04.19 05:19:44
3. -_-
안되요되요되요~^^
2012.04.19 14:04:09
4. -_-
문창과드립인가
2012.04.19 16:02:44
5. -_-
벚꽃 만개한 길을 걸어갔지요.
햇살이 눈부셔 그런 것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자꾸 봄이 눈에 들어오지 않네요.
나만 힘든 것도 아닐진데
왜 봄은
자꾸만 내 눈길을 피하려 하는지 모르겠어요.
2012.04.19 22:58:51
6. -_-
아으 다롱디리 어우 야아~ 아흥~
2012.04.19 23:31:06
7. -_-
(추천 수: 1 / 0)
그대, 봄. 나도 봄.
2012.04.19 23:32:35
8. -_-
2012.04.20 03:08:49
9. -_-
(추천 수: 1 / 0)
정말이지 요즘 화낙은 수작이 풍년이로구나.
글재주들이 참 좋아들. 부럽기도 하고.
역시 원래 무표정은 무낙;; 사이트였어.
번호
제목
글쓴이
147 [화낙] 부치지 못한 편지 9 알김; 3849   2015-11-23
146 [화낙] 록큰롤에게 존속살해당한 재즈 (1부, 2부 통합) 알김 3794   2014-11-03
145 [화낙] 저는 다음 생에도 어머님의 아들로 태어나고 싶습니다 1 알김; 3214   2014-11-03
144 [화낙] 한적한 오후의 마스터베이션 -_- 6288   2013-10-28
143 [화낙] 이직 블랙잭 - 생활복서 -_- 7937   2013-10-28
142 [화낙] 섹스를 안하고 싶을 때도 있는 거다. - 김논리 1 -_- 5928   2013-10-28
141 [화낙] 때가 됐다. - 김화가 -_- 4374   2013-10-28
140 [화낙] 외로움을 사드립니다 -_- 4065   2013-10-28
139 [화낙] 모를 일이다 -_- 3999   2013-10-28
138 [화낙] 나이를 먹었다 -_- 3828   2013-10-28
137 [화낙] 어서 와. 이런 사무실은 처음이지? - ROSEBUD -_- 4804   2013-10-28
136 [화낙] 일단은 나쁜 년으로 시작된 글 -_- 4644   2013-10-28
135 [화낙] 술 마시는 날 -_- 10331   2013-10-28
134 [화낙] 그냥 짧게 쓰는 내 이야기, 어디선가 고생하는 도예 후배한테 -_- 4028   2013-10-28
133 [화낙] 비행기가 지나간다 -_- 3961   2013-10-28
132 [화낙] 추워서 좃같지만 화이팅 -_- 3877   2013-10-28
131 [화낙] 흑인 페미니즘과 성재기 -_- 4715   2013-10-28
130 [화낙] 가장 추운 날 - 구린곰 -_- 3821   2013-10-28
129 [화낙] 내 할머니 - S -_- 4480   2012-09-16
[화낙] 그대가 봄 -_- 4618   2012-09-16
XE Login